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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비는 왜 30년째 제자리인가

7월 31일
6분 분량

DEEP RESEARCH · ARCHITECTURE FEE

설계비는 왜 30년째 제자리인가


대가기준의 침묵, 저가 수주의 악순환, 그리고 1인 건축사사무소의 생존 문법 — 왜 지금 '건축사 설명의무'가 판로(販路)가 되는가


목차


1. 가격은 1993년에 멈췄고, 책임은 2026년으로 왔다


2. 소수점 한 자리의 나라 — 숫자가 말하는 진실


3. 왜 이렇게 됐는가 — 설명되지 않은 노동에는 값이 붙지 않는다


4. 어떻게 바꿀 것인가 — 설명의무를 상품으로 만들어라


5. 지금 당장 시작할 것 — 12개월 로드맵


6. 바꾸면 이만큼 달라진다


7. 작아서 죽는가, 같아서 죽는가



1. 가격은 1993년에 멈췄고, 책임은 2026년으로 왔다



설계비는 1993년에 멈췄다. 책임은 멈추지 않았다.


공공 건축설계 대가요율은 1993년 고시된 뒤 28년 동안 손대지 않았다. 2020년 개정으로 평균 3.3% 올랐다. 28년에 3.3%다. 그 사이 공사비는 몇 배가 됐고, 건축사가 검토해야 할 법령은 계속 늘었으며, 설계자에게 손해배상을 인정한 판례도 계속 쌓였다. 가격표만 냉동돼 있었다.


문제는 이 냉동이 공공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간 설계대가는 공공 기준의 10~30% 수준에 머문다. 2021년 건축서비스산업 실태조사에서 공사비요율 방식으로 수주한 건축설계의 평균 대가는 0.4%로 집계됐다. 미국과 영국은 공사비의 7~15%를 설계에 쓴다. 비교의 단위가 다른 게 아니라 소수점 자리가 다르다.


이 글은 그 격차를 한탄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격차의 원인을 업계가 잘못 짚고 있다고 말하려고 쓴다. 우리는 30년 동안 "기준이 없어서"라고 답해왔다. 2026년 2월, 그 기준이 생겼다. 건축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공공에만 적용되던 업무범위·대가기준을 민간에도 준용할 근거가 마련됐다. 2009년 독과점 논란으로 폐지된 지 17년 만이다.



그런데 기준이 생겨도 값은 저절로 오르지 않는다.


값은 근거가 있어야 오른다. 근거는 법령이 아니라 설명에서 나온다. 건축주가 지불을 납득하는 순간은 고시를 읽었을 때가 아니라, 자기가 무엇을 샀는지 알게 됐을 때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하겠다.



2. 소수점 한 자리의 나라 — 숫자가 말하는 진실


먼저 좌표를 찍자. 한국 건축설계 시장이 어디에 서 있는지 숫자로 확인해야 다음 논의가 가능하다.



■ 표 1. 건축설계 대가 수준 국제 비교 (공사비 대비 요율)

한국 민간의 0.4%는 미국·영국 하한선의 20분의 1 수준이다. 이 숫자를 '경쟁력'이라 부를 수는 없다.

여기에 두 번째 숫자를 겹치면 그림이 완성된다. 이 저가 시장을 감당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 표 2. 건축사사무소 규모 구조와 시장 점유

이 두 표를 나란히 놓으면 한 문장이 나온다. 한국 건축설계는 세계 최저 수준의 대가를, 세계에서 가장 잘게 쪼개진 조직이 감당하고 있다. 협상력이 가장 약한 주체가 가장 낮은 가격을 받는 구조다. 시장 실패라는 말은 이럴 때 쓴다.


게다가 민간부문은 국내 연간 건축 수주액의 약 73.5%를 차지한다. 규칙이 없는 영역이 시장의 4분의 3이었다는 뜻이다.

3. 왜 이렇게 됐는가 — 설명되지 않은 노동에는 값이 붙지 않는다



작을수록 손해 보는 요율표


대가기준은 공사비에 요율을 곱한다. 공사비가 작으면 대가도 작아진다. 문제는 일이 그만큼 줄지 않는다는 데 있다. 20억짜리 근린생활시설도 대지 분석을 하고, 조례를 뒤지고, 심의를 받고, 인허가 보완에 응답한다. 200억짜리와 절차의 가짓수는 거의 같다. 업계는 10억 원 미만 소규모 설계의 실투입이 대가요율의 3~5배에 이른다고 말한다.


2020년 개정에서 20억 원 이하 건축물의 인상률을 평균보다 높게 잡은 것은 이 왜곡을 인정한 조치다. 그러나 6~7%의 보정으로 3~5배의 간극이 메워지지는 않는다. 작은 일을 할수록 손해 보는 요율표는 여전히 살아 있다.



설명하지 않은 노동은 존재하지 않은 노동이 된다


건축사가 하는 일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배치를 여덟 번 바꾸다가 아홉 번째를 채택한 과정, 조례 해석이 갈리는 지점에서 담당 공무원과 조율한 통화, 단열재 두께를 바꾸면 어디에서 결로가 생기는지 계산해 본 시간. 건축주가 받는 것은 결과물인 도면 한 벌이다.


그래서 건축주의 머릿속에서 설계비는 '도면 값'이 된다. 도면은 종이다. 종이 값을 깎는 데 죄책감은 들지 않는다. 반면 시공비는 자재와 인력이 눈에 보인다. 같은 논리로 깎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노동은 싸지는 게 아니라 없어진다.


이것이 저가 수주의 진짜 뿌리다. 가격 경쟁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설명되지 않은 노동만 남은 시장에서는 비교할 수 있는 항목이 가격밖에 없다. 모두가 똑같이 '설계 일식'을 팔면, 남는 변수는 금액 하나다.

침묵의 비용은 준공 후에 청구된다


설명하지 않은 대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지연 청구될 뿐이다. 준공 2년 뒤 발코니에 물이 맺히면 건축주는 묻는다. 왜 이렇게 설계했느냐. 그때 건축사가 내밀 수 있는 것이 도면뿐이라면, 그 판단이 최선이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법정에서 설계계약은 대체로 도급계약으로 다뤄진다. 결과물에 하자가 있으면 건축주는 보수에 갈음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설계 단계에서 대안과 한계를 고지하지 않았다면, 그 위험을 건축주가 인수했다고 주장하기 어려워진다. 감정 실무에서 이 지점은 반복해서 갈린다. 협의록이 있는 사건과 없는 사건의 결론이 달라진다.


설계비 300만 원을 깎아 수주한 프로젝트가 3년 뒤 3천만 원짜리 분쟁으로 돌아온다. 업계는 이 계산을 아직 장부에 적지 않는다.


3초 만에 기획설계를 내놓는 경쟁자


여기에 새 변수가 들어왔다. 필지 주소와 용도를 입력하면 3초 만에 기획설계안과 예상 공사비를 내놓는 플랫폼이 이미 상용화됐다. 모듈러 업체는 표준설계 라이브러리에서 최적안을 추천한다. AI는 반복적인 도면 상세화 업무를 80% 이상 줄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소규모 사무소 입장에서 이건 양날의 칼이다. 도구를 쥐면 생산성이 오른다. 도구를 못 쥐면 대체된다. 그런데 더 위험한 시나리오는 세 번째다. 모두가 같은 도구를 쥐어 결과물이 똑같아지는 경우다. 그때 시장에는 다시 가격만 남는다.



작아서 죽는 게 아니다. 같아서 죽는다.


4. 어떻게 바꿀 것인가 — 설명의무를 상품으로 만들어라



제도: 근거는 생겼다, 이제 채워야 한다


2026년 2월 1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건축사법 개정으로 민간 발주 건축물에도 건축사 업무범위·대가기준을 준용할 근거가 마련됐다. 명의대여 금지 등은 공포 후 6개월, 대가기준 민간 준용은 공포 후 1년이 지난 시점부터 시행된다. 건축사가 아닌 자의 설계 영업·홍보에는 형사처벌 규정이 붙는다.


제도는 바닥을 깔아준다. 바닥이 곧 가격은 아니다. 준용 규정은 강제 요율표가 아니라 협상의 기준선이다. 기준선은 그것을 읽고 쓸 줄 아는 쪽만 활용한다. 지금 준비할 것은 요율표 암기가 아니라, 그 요율에 대응하는 업무범위를 문서로 분해하는 능력이다.

설명의무: 무료 서비스에서 유료 성과물로


건축사의 설명은 지금 대부분 무료로 제공된다. 미팅에서 구두로 소비되고 기록되지 않는다. 이것을 성과물로 전환하는 것이 이 글의 핵심 제안이다.


방법은 단순하다. 설명을 문서로 남기고, 그 문서를 계약서의 납품 목록에 넣는다. 대안비교표, 선택근거 로그, 설계의도 구현 협의록, 유지관리 설명서. 이름은 무엇이든 좋다. 중요한 것은 건축주가 '샀다'고 인식할 수 있는 형태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 문서는 두 번 값을 한다. 계약 시점에는 대가 산정의 근거가 되고, 분쟁 시점에는 방어 자산이 된다. 감정인 입장에서 말하면, 이 기록의 유무가 책임 배분을 가른다.

■ 표 3. 단계별 설명의무 이행 체크리스트

이 표의 오른쪽 두 열이 곧 청구서다. 기록물이 없으면 설명은 없었던 일이 된다.


협업 네트워크: 규모를 빌려 쓰는 법


1인 사무소가 5인 사무소가 되는 것은 답이 아니다. 고정비만 늘고 리스크는 그대로다. 답은 필요할 때만 규모를 빌리는 구조에 있다.


구조·설비·에너지·법규·감리·분쟁감정을 각각 강점으로 가진 사무소들이 상시 컨소시엄을 맺는다. 수주는 각자 하되, 프로젝트마다 필요한 역량을 조합한다. 계약·보험·회계 같은 백오피스는 공동으로 쓴다. 대형사무소와 붙을 때 조직도에 올릴 이름이 생기고, 배상책임보험 협상력도 올라간다. '가상 대형사무소'라고 부를 만한 모델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한다. 지역이다. 조례 해석, 심의 위원 성향, 인허가 관행은 플랫폼이 학습하지 못하는 정보다. 동네 건축사사무소의 진짜 자산은 도면 실력이 아니라 이 로컬 지식이다. 문제는 그것 역시 지금까지 무료였다는 점이다.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상품에 얹어야 한다.

디지털 전환: 종이 체크리스트에서 AI 펀치리스트로


설명을 상품으로 만들려면 설명이 자동으로 기록돼야 한다. 사람이 회의 끝나고 손으로 정리하는 방식으로는 두 달을 못 간다. 여기서 도구가 개입한다.


현장을 그려보자. 지금 감리자는 종이 체크리스트를 들고 계단을 오른다. 사진은 개인 휴대폰에 쌓이고, 지적사항은 카톡으로 흩어진다. 준공 후 그 기록을 다시 모으는 데 며칠이 걸린다. 모바일 펀치리스트로 바꾸면 지적 위치·사진·조치 이력이 한 건씩 자동으로 묶인다. 설계의도가 어디서 어떻게 구현됐는지가 데이터로 남는다.


AI는 그 위에 얹힌다. 법규 검토와 간섭 체크를 자동화하고, 반복 상세를 이식하고, 하자 다발 부위를 과거 데이터에서 끌어와 경고한다. 여기서 절약된 시간을 어디에 쓰느냐가 갈림길이다. 가격을 더 내리는 데 쓰면 악순환이 가속된다. 설명과 검증에 재투자하면 단가가 올라간다.



AI가 만든 여유는 할인이 아니라 설명에 써야 한다.

■ 표 4. 아날로그 업무와 AI 기반 디지털 업무 비교

5. 지금 당장 시작할 것 — 12개월 로드맵


언제 시작해야 하는가. 지금이다. 대가기준 민간 준용은 공포 후 1년이 지나면 시행된다. 그 시점에 문서 체계를 갖추고 있는 사무소와 그렇지 않은 사무소의 협상 위치는 완전히 다르다.

■ 표 5. 소규모 건축사사무소 실행 로드맵

6. 바꾸면 이만큼 달라진다


첫째, 대가 협상의 언어가 바뀐다. "이 정도는 받아야 한다"에서 "이 항목을 이만큼 수행하고 이 문서로 납품한다"로 옮겨간다. 후자는 깎기 어렵다. 깎으려면 항목을 빼야 하고, 항목을 빼면 책임도 함께 빠지기 때문이다.


둘째, 분쟁 비용이 줄어든다. 설계 단계 협의 기록이 있는 사건은 감정과 재판에서 쟁점이 빠르게 좁혀진다. 책임 범위가 명확해지면 건축사가 지지 않아도 될 책임을 지는 일이 줄어든다.


셋째, 사후관리라는 새 수익 구간이 열린다. 준공에서 관계가 끊기는 구조가 한국 설계시장의 매출 천장이었다. 관리 이력을 쥔 사무소는 점검·개선·증축에서 다시 호출된다.


넷째, 소규모가 약점이 아니게 된다. 건축주와 직접 대화하고, 현장에 30분 안에 도착하고, 그 지역 심의 관행을 아는 것은 대형사무소가 흉내 내기 어려운 조건이다. 이 강점은 설명이라는 형식을 갖출 때 비로소 가격이 된다.

7. 작아서 죽는가, 같아서 죽는가


30년 동안 업계는 대가기준이 없어서 값을 못 받는다고 말해왔다. 2026년, 기준이 생겼다. 이제 변명 하나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증명이다. 설계가 무엇을 하는 일인지, 그 일이 없으면 무엇이 잘못되는지, 건축주가 알아들을 수 있는 형태로 내놓아야 한다. 그것이 설명의무다. 법이 시켜서 하는 의무가 아니라, 값을 받기 위한 판매 행위로 이해해야 한다.


플랫폼은 3초 만에 안을 내놓는다. AI는 상세를 80% 대신 그린다. 그 시장에서 살아남는 조건은 더 빨리 그리는 것이 아니다. 왜 그렇게 그렸는지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기계는 답을 내놓지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책임을 지는 자만이 설명할 자격이 있고, 설명할 수 있는 자만이 값을 부를 수 있다.



설계비는 도면 값이 아니다. 설명의 값이다.

참고자료


· 국토교통부,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 고시 및 개정안 (2020)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공공분야 건축설계 대가기준(요율) 개정, 1993년 이후 28년만」


·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건축사 업무범위·대가기준 민간 준용 담은 건축사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2026.2)


· 대한경제, 「민간 건축설계대가 기준 이르면 상반기 법제화」


· 건축공간연구원(AURI), 「2023년 건축서비스산업 실태조사 결과」


· 건축공간연구원, 「2021년 건축서비스산업 실태조사」 — 공사비요율 방식 평균대가 0.4%


· RIBA, How do architects calculate their fees / AIA, Calculating the architect's fee


· 인공지능 기반 건축설계 자동화 기술개발 연구단(AIBIM) 연구성과 자료


· 대한경제, 「"3초만에 기획설계" 플랫폼의 침투… 건축업계 준비됐나」


· 국가법령정보센터, 설계자의 손해배상책임 관련 판례 및 「건축물의 설계표준계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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