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건축사와 이름 없는 건축사

ARCHITECTURE · MARKET STRUCTURE · AI · 20
스타 건축사와 이름 없는 건축사
설계는 AI로 다르게, 감리는 AI로 철저하게


건축은 오래전부터 이름의 산업이었다. 설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이다. 발주자는 아직 세상에 없는 건물을 사야 하고, 사기 전에는 그 품질을 확인할 방법이 없다. 확인할 수 없는 것을 살 때 사람은 이름을 산다. 그래서 이 시장에는 늘 스타 건축사가 있었고, 스타가 가져가는 몫은 실력의 차이보다 컸다.
그 구조에 생성형 AI가 들어왔다. 2026년 7월 대한건축사협회 AI위원회 설문에서 응답자 763명 가운데 AI를 전혀 쓰지 않는다는 사람은 11.1%뿐이었다. 열에 아홉은 이미 쓴다. 도구는 모두의 손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격차는 줄어드는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AI는 생산의 격차를 좁히고 가격의 격차를 벌린다. 이 둘을 구분하지 못하면 이름 없는 건축사는 도구만 열심히 배우다가 제자리에 머문다.
이 글이 묻는 것은 하나다. 스타 건축사에 맞서 이름 없는 건축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부터 적는다. 설계는 AI로 다르게, 감리는 AI로 철저하게. 그리고 그 둘을 자기 이름으로 쌓아야 한다.
1. 스타 건축사는 일을 고르고, 이름 없는 건축사는 고름을 당한다

숫자부터 보자. 건축공간연구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국내 건축서비스 사업체는 3만 1,476개다. 이 가운데 1~4인 사업체가 2만 5,141개(79.9%)인데, 이들이 나눠 갖는 매출은 전체의 39.2%다. 사업체당 약 6.8억 원으로 산업 평균 13.8억 원의 절반에 못 미친다. 설계·엔지니어링·감리를 모두 포괄한 수치다.
■ 표1. 건축서비스산업의 규모별 구조 (2023년 기준)

자료: 건축공간연구원(AURI), 건축서비스산업 실태조사. 평균값은 발표 총계로부터 계산.
건축사만 떼어 보면 구조는 더 선명하다. 대한건축사협회 정회원 1만 7,701명(2026년 6월 기준) 가운데 직원 없이 혼자 일하는 1인 건축사가 1만 1,679명이다. 셋 중 둘이다.
작다는 것 자체가 병은 아니다. 미국은 10인 미만 사무소가 약 75%이고 독일은 89%다. 작은 사무소는 이 직업의 기본형에 가깝다. 문제는 작은 채로 이름이 없다는 데 있다.
셔윈 로젠은 「슈퍼스타의 경제학」(1981)에서 소수가 시장을 지배하는 조건을 둘로 설명했다. 평범한 것 여러 개가 뛰어난 것 하나를 대신하지 못하는 불완전 대체성, 한 번 만든 것을 여러 번 팔아도 비용이 비례해 늘지 않는 규모의 경제. 두 조건이 겹치면 재능의 작은 차이가 소득의 큰 차이로 증폭된다.
건축에는 두 조건이 다 있다. 평범한 건축사 세 명이 뛰어난 건축사 한 명을 대신하지 못하고, 한 번 만들어진 이름은 프로젝트가 늘어도 추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스타 건축사는 들어온 일 중에서 고르고, 이름 없는 건축사는 고름을 당한다.

2. AI는 바닥을 올리고, 결과물을 닮게 만든다

AI가 격차를 좁힌다는 증거는 단단하다. 브린욜프슨 등(2023)의 고객상담 실험에서 생산성은 평균 14% 올랐는데, 하위 숙련자는 35% 오르고 상위 숙련자는 거의 그대로였다. 하버드 경영대학원과 BCG의 컨설턴트 758명 실험(델라쿠아 외, 2023)에서도 하위 성과자는 43%, 상위 성과자는 17% 향상됐다. 바닥이 천장보다 두 배 넘게 올라왔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도시와 하우저의 연구(Science Advances, 2024)에서 AI의 도움을 받은 작가들은 신규성이 10.7%, 문장 품질이 26.6% 좋아졌다. 그런데 이야기끼리의 유사도도 10.7% 올라갔다. 개인은 나아졌고 집단은 서로 닮아 갔다.
■ 표2. 생성형 AI의 성과 격차 — 세 개의 실험

주: 세 연구 모두 건축이 아닌 타 직군 실험이다. 건축으로의 적용은 필자의 해석이다.
건축도 다르지 않다. 렌더링, 매스 스터디, 계획 보고서의 평균 품질은 2년 전보다 확실히 올라갔고 그만큼 서로 닮아 간다. 설문에서 이미지 생성을 쓴다는 건축사가 55.2%다. 모두의 포트폴리오가 좋아 보이면 포트폴리오는 더 이상 차별점이 되지 못한다.
델라쿠아 연구에는 덜 알려진 결과가 하나 더 있다. AI의 능력 밖에 있도록 설계한 과제에서는 AI를 쓴 쪽의 정답률이 오히려 19퍼센트포인트 낮았다. 도구는 자기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그 경계는 일을 오래 해 본 사람만 안다.

3. 발주자는 품질이 아니라 신호를 산다

품질이 오르면 값도 올라야 한다. 설계 시장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다. 국내 건축물의 97.2%가 민간건축물이고, 민간 건축서비스 계약의 77.6%가 수의계약이며, 민간 설계대가는 공사비의 0.4% 수준에 머문다.
수의계약에서는 여러 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발주자는 사람을 먼저 고르고 값은 나중에 정한다. 고르는 근거는 검증된 품질이 아니라 아는 사람, 소개, 들어 본 이름이다.
경제학은 이런 상품을 신뢰재라고 부른다. 사기 전에도, 쓰고 난 뒤에도 품질을 판단하기 어려운 상품이다. 의료·법률·감정·설계가 모두 여기 속한다. 신뢰재의 값은 품질이 아니라 품질의 신호가 정한다.
품질이 값이 되려면 네 단계를 거쳐야 한다. 품질이 오르고, 발주자가 그 차이를 알아보고, 여러 안을 비교하고, 더 나은 쪽에 더 높은 대가를 준다. AI가 밀어 올리는 것은 첫 단계뿐이다. 나머지 세 단계는 이 시장에서 막혀 있다. 이름 없는 건축사가 뚫어야 할 곳도 바로 그 세 단계다.
■ 표3. 품질이 가격이 되는 경로와 이름 없는 건축사의 돌파구

자료: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2023. 10.) 보도 수치 재구성. 돌파구 열은 필자의 제안이다.
AI는 품질을 올려 주지만 신호를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신호가 되지 못한다. 스타 건축사의 신호는 이름이다. 이름 없는 건축사에게는 다른 신호가 필요하다. 발주자가 계약 전에 눈으로 확인하는 신호, 그리고 공사 기간 내내 매주 확인하는 신호. 앞의 것이 설계이고 뒤의 것이 감리다.

4. 설계는 AI로 다르게 그린다
스타 건축사는 이름으로 설득한다. 이름 없는 건축사는 첫 미팅에서 보여 주는 것으로 설득해야 한다. 여기서 AI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다만 쓰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기본 프롬프트로 뽑은 투시도는 모두 닮는다. 앞에서 본 유사도 10.7%가 말하는 그대로다. 차별화는 AI를 자기 관점으로 부릴 때 생긴다. 이 대지의 일조와 조망, 이 동네의 가로 풍경, 이 발주자가 운영할 사업의 동선을 이미지 안에 담는 것이다. 누구나 뽑는 그림이 아니라 이 땅에서만 나올 수 있는 그림. 그것이 AI 시대 설계의 차별화다.
차별화된 이미지는 세 가지에서 나온다. 맥락. 대지 사진과 주변 가로, 일조 방향을 입력으로 넣어 만든 이미지는 다른 땅에서 재현되지 않는다. 축적. 자기 스케치와 재료, 디테일을 레퍼런스로 쌓아 두고 매번 그 위에서 생성하면 몇 달 뒤에는 그 사무소만의 톤이 생긴다. 스타 건축사의 스타일이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면 이름 없는 건축사는 AI로 그 축적 속도를 앞당길 수 있다. 검증. 그림 속 형태가 법규와 구조와 공사비 안에서 실제로 지어질 수 있는지 확인한 이미지만 내놓는다.

속도도 무기다. 예전에는 대안 하나를 그리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이제는 하루에 대안 여러 개를 매스, 투시도, 면적표, 법규 검토 초안까지 붙여 나란히 놓을 수 있다. 발주자가 "이렇게 바꾸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을 때 다음 날 답을 들고 가는 건축사와 2주 뒤에 답하는 건축사의 차이는 크다. 이름으로 앞설 수 없다면 응답성으로 앞서야 한다.
그러려면 첫 미팅에 들고 가는 것부터 바꿔야 한다. 예전의 첫 미팅은 명함과 포트폴리오였다. 포트폴리오는 과거의 다른 땅을 보여 준다. 이제는 발주자의 땅으로 만든 자료를 들고 가야 한다.

■ 표4. 첫 미팅 패키지 — 계약 전에 품질을 보이게 만드는 다섯 가지

주: 항목 구성은 필자의 제안이다. 법규 검토 초안은 반드시 건축사가 원문 조문으로 다시 확인한다.
작업 순서도 달라져야 한다. 건축사가 먼저 손으로 스케치하고, AI가 그 스케치를 여러 갈래로 펼치고, 건축사가 다시 고른다. 순서가 뒤집히면 AI가 고르고 건축사가 따라가게 되고, 결과물은 다시 서로 닮는다. 손 스케치 한 장이 AI 시대에 오히려 더 비싸지는 이유다.
이것이 수의계약 시장의 벽을 넘는 방법이다. 비교가 일어나지 않는 시장에서는 계약 전 단계에서 품질을 눈에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 선택된다. AI 이미지는 그 자체로 신호가 아니다. 이 땅과 이 발주자에 맞춘 판단이 실린 이미지가 신호다. 그림은 AI가 그리고, 판단은 건축사가 싣는다.
세 번째 조건인 검증은 특히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 감정 현장에서 보면 계획 단계의 이미지와 준공된 건물의 차이가 분쟁의 씨앗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발주자는 투시도를 약속으로 기억한다. 지어질 수 없는 그림을 보여 주고 계약을 따면 그 그림은 몇 년 뒤 법정에 증거로 올라온다. 예쁜 그림으로 일을 따기는 쉽다. 지어질 그림으로 일을 따야 이름이 된다.

5. 감리는 AI로 철저하게 한다

감리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신호의 관점에서 감리는 설계보다 유리한 자리에 있다. 설계는 준공 때 한 번 결과가 드러나지만 감리는 매주 발주자와 만난다. 검측 한 건, 시정 요구 한 건이 모두 발주자 앞에 놓인다. 접점이 잦은 만큼 신호도 잦다.
감리는 법이 정한 책임이기도 하다. 건축법은 공사감리자를 설계도서의 내용대로 시공되는지 확인하고 품질관리·공사관리·안전관리를 지도·감독하는 자로 정의한다(제2조). 법령 위반이나 설계도서와 다른 시공을 발견하면 건축주에게 알리고 시정이나 재시공을 요청해야 한다(제25조). 그런데 현실의 감리는 인력과 시간의 싸움이다. 소규모 현장일수록 감리자 한 명이 여러 현장을 맡고, 한 번 방문해서 확인할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된다. 이 간극을 무엇으로 메우느냐가 감리의 질을 가른다.
그래서 감리앱을 쓰는 사무소가 늘고 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감리앱의 핵심은 화면이 예쁜 데 있지 않다. 깔끔한 대시보드와 보기 좋은 보고서 양식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몇 달이면 누구나 따라온다. AI 렌더링이 그랬듯 겉모습은 금방 평준화된다. 발주자가 결국 확인하는 것은 화면이 아니라 건물이다. 비가 새지 않는 지붕, 하자 분쟁 없는 준공이다.
선진화된 감리앱은 보여 주는 감리가 아니라 감리 자체를 철저하게 만든다. 적어도 다섯 가지는 해야 한다.
첫째, 검측 누락을 막는다. 설계도서와 시방서에서 공종별 검측 항목을 뽑아 공정 일정에 맞춰 배정한다. 오늘 확인할 항목이 빠짐없이 올라오고, 확인하지 않은 항목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경고한다.
둘째, 사진을 AI가 먼저 읽는다. 철근 배근 간격과 피복, 방수층 겹침, 균열처럼 이상이 의심되는 지점을 AI가 1차로 짚고 감리자가 최종 판단한다. 사람의 눈이 놓친 곳을 기계가 한 번 더 본다.
셋째, 모든 기록이 시각과 위치에 고정된다. 지적 사항 하나에 발행 시각, 발행자, 도면 좌표, 현장 사진이 함께 붙는다. 현장을 떠난 뒤 기억에 기대 정리하는 기록과는 다르다.
넷째, 지적은 닫힐 때까지 추적된다. 지적, 조치, 재확인이 한 줄로 이어지고 열린 채 남은 지적 사항이 한눈에 보인다. 시정을 요구해 놓고 확인을 잊는 일이 없어진다.
다섯째, 하자가 날 자리를 미리 경고한다. 누수·결로·균열처럼 분쟁이 반복되는 부위를 해당 공정이 시작되기 전에 짚어 준다. 창호 주위 실링, 지하 방수, 발코니 배수처럼 마감이 덮이면 다시 볼 수 없는 부위가 대상이다.
감리자의 하루로 옮겨 보면 차이는 더 구체적이다. 현장에 가기 전, 앱은 오늘 공정에 걸린 검측 항목과 지난 방문에서 열어 둔 지적 사항을 목록으로 올린다. 무엇을 봐야 할지는 현장 도착 전에 정리된다. 현장에서는 도면 위 위치를 누르고 사진을 찍으면 기록이 그 자리에 붙는다. AI가 사진에서 의심 지점을 표시하면 감리자는 그 자리에서 다시 확인한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일지를 새로 쓰지 않는다. 현장에서 쌓인 기록이 곧 감리일지이고 발주자 보고서다. 밤마다 기억을 더듬어 보고서를 쓰던 시간이 판단에 쓰는 시간으로 바뀐다.
■ 표5. 공종별로 AI 감리가 짚어야 할 지점

주: 공종별 지점은 하자 분쟁에서 반복되는 부위를 필자가 예시로 정리한 것이다.
이 다섯 가지가 이름 없는 건축사에게 특히 중요한 이유가 있다. 1인·소규모 사무소의 약점은 사람이 모자란다는 것이다. 여러 현장을 혼자 돌다 보면 검측 항목이 빠지고, 사진은 쌓이기만 하고, 지적 사항은 확인되지 않은 채 남는다. AI 감리앱은 바로 그 빈틈을 메운다. 1인 사무소가 여러 명이 붙은 감리단 수준의 검측 밀도를 낸다. 규모의 약점을 도구가 채운다.
감정인의 자리에서 보면 이 차이는 더 분명하다. 하자 분쟁 현장에서 되풀이되는 장면이 있다. 하자 자체보다 기록이 없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가 되는 장면이다. 누가, 언제, 어디를 확인했는지 남아 있지 않으면 감리자는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다. 3년 뒤 법정에서 사후에 정리한 종이 일지는 힘이 약하고, 시각과 좌표가 박힌 검측 기록은 힘이 있다.
도입할 때 지켜야 할 원칙도 있다. AI 판독은 보조다. 의심 지점을 짚는 데까지가 기계의 몫이고 적합·부적합의 판단과 서명은 감리자의 몫이다. 이 경계를 흐리면 델라쿠아 실험의 19퍼센트포인트가 감리 현장에서 되풀이된다. 또 감리앱은 시공사를 감시하는 도구가 아니라 발주자·시공사·감리자가 같은 사실을 보는 공통 기록이어야 한다. 같은 기록을 보는 사람들 사이의 다툼은 법정까지 가기 전에 정리될 여지가 커진다.
그렇다면 감리앱을 고를 때는 무엇을 물어야 하는가. 화면 캡처나 데모 영상으로는 알 수 없다. 아래 여섯 가지 질문에 모두 '예'라고 답하지 못하는 앱은 보여 주는 감리앱이다.
■ 표6. 감리앱을 고를 때 물어야 할 여섯 가지

주: 질문 구성은 필자의 제안이다.
그리고 이 철저함이 곧 브랜드가 된다. 발주자가 매일 여는 화면에 빠짐없는 검측과 닫힌 지적 사항이 쌓여 있으면 그 감리자는 매일 자기 실력을 증명하는 셈이다. 예쁜 화면은 처음 한 번 인상을 남기고, 철저한 기록은 공사 기간 내내 신뢰를 쌓는다. 같은 기록이 안으로는 분쟁의 방어력이 되고 밖으로는 시장의 신호가 된다.

■ 표7. 보여 주는 감리앱과 철저한 AI 감리앱

주: 감정 실무에서 기록의 증거력을 판단하는 기준을 감리앱 요건으로 다시 배열한 필자의 구분이다.

6. 고용하지 않고 연결한다

1인 건축사 1만 1,679명이라는 숫자는 오랫동안 영세함의 지표로 읽혔다. 그런데 이 해석은 도구의 조건이 바뀌면 함께 바뀐다.
사무소에 규모가 필요했던 이유는 분업이었다. 도면을 그리는 손, 법규를 찾아 정리하는 눈, 보고서를 쓰는 시간, 렌더링을 돌리는 장비와 인력. 설문에서 AI가 대신하고 있다고 나온 일(정보 검색·요약 62.3%, 이미지 생성 55.2%)은 대부분 사무소가 사람을 쓰던 이유였던 일이다. 신입이 배우면서 하던 일이고, 규모를 갖춰야 감당할 수 있던 일이다.
AI는 규모의 필요를 줄인다. 고정비를 진 조직과 지지 않은 개인이 같은 산출물을 낼 수 있게 되면 규모는 경쟁력이 아니라 비용이 된다. 다만 줄어드는 것은 손의 필요이지 판단의 필요가 아니다. 구조, 설비, 법규, 시공성은 여전히 여러 사람의 눈을 필요로 한다. 달라지는 것은 그 사람들을 고용하느냐, 연결하느냐다.
협회가 논의하는 건축사법인 제도나 협업 네트워크 모델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하나의 큰 사무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개인들이 사안별로 결합하는 구조다. 미국·영국·호주에서 이미 작동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감리는 연결의 효과가 가장 크게 나는 영역이다. 검측 항목과 기록 방식이 표준화되어 있으면 여러 건축사가 한 현장을, 한 건축사가 여러 현장을 같은 품질로 맡을 수 있다. 같은 기준으로 일하는 건축사들의 네트워크는 대형 감리단에 맞설 수 있다. 한 사람의 이름이 약하면 같은 기준으로 일하는 여러 이름이 묶여 하나의 브랜드가 된다.

7. 도구가 아니라 절차가 격차를 만든다
설계와 감리에 AI를 쓰라는 말은 도구를 사라는 말이 아니다. 같은 설문에서 AI를 코딩·업무 자동화에 쓴다는 응답은 6.4%였다. 정보 검색·요약 62.3%의 10분의 1이다. 검색과 요약은 모두를 같이 빠르게 할 뿐 격차를 만들지 않는다. 격차는 반복 업무를 자기 손에서 떼어 내는 자동화에서부터 생긴다.
6.4%에서 막히는 이유는 도구가 어려워서가 아니다. 자기 업무를 공정으로 쪼개 본 적이 없어서다. 설계 한 건, 감리 한 현장의 처리 과정을 스무 단계로 적어 본 사람만 그중 무엇을 기계에 넘길지 안다. 감리앱도 같다. 자기 검측 절차가 없는 사람에게 앱은 예쁜 앨범이고, 절차가 있는 사람에게는 감리단이 된다.
끝까지 남는 것은 서명이다. AI는 대안 100개를 만들지만 그중 하나에 이름을 걸지 않는다. 도면과 감리보고서에 서명하는 순간 건축사는 그 결과를 진다. 서명은 산출물이 아니라 책임이고, 책임은 생성되지 않는다.
그 책임이 쌓인 흔적이 신호다. AI가 대신 만들어 줄 수 없는 신호는 다섯 가지로 추릴 수 있다. 공통점은 시간과 책임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시간은 아직 생성되지 않는다.

■ 표8. AI가 대신 만들어 줄 수 없는 다섯 개의 신호

주: 신호 구분은 필자의 분류다.
표의 다섯 가운데 이름 없는 건축사가 당장 손댈 수 있는 것은 셋째와 넷째다. 준공 실적은 기다려야 얻지만 감리 기록은 다음 현장부터 쌓이고, 서명된 글은 오늘 쓸 수 있다. 둘 다 AI가 속도를 올려 준다. 다만 판단은 자기 것이어야 한다. AI가 대신 쓴 글에는 판단이 없고, 판단이 없는 기록은 신호가 되지 않는다.

■ 표9. 스타 건축사에 맞서는 이름 없는 건축사의 전략

주: 전략 구분은 필자의 분류다.
실행은 90일이면 시작할 수 있다. 설계와 감리를 나란히 놓고 같은 순서로 밟는다. 순서를 바꾸면 작동하지 않는다. 분해가 없으면 자동화가 없고, 자동화가 없으면 판단에 쓸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으면 신호는 쌓이지 않는다.

■ 표10. 90일 실행 순서

주: 지표는 최소 기준이다. 세 구간 중 하나라도 건너뛰면 다음 구간이 성립하지 않는다.
첫 구간이 가장 어렵고 가장 지루하다. 그러나 6.4%와 62.3% 사이의 거리는 대부분 여기서 생긴다. 자기 일을 공정으로 적어 본 사람과 적어 보지 않은 사람의 차이이지, 도구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가 아니다.

맺으며 — 이름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다
첫 문장으로 돌아가자. 같은 도면을 그려도 어떤 이름은 열 배를 받는다. AI는 이 문장을 지우지 못하고 오히려 더 선명하게 만든다. AI가 좁히는 것은 생산의 격차이고 벌리는 것은 가격의 격차다.
그러니 도면을 남보다 빨리 그려서 이기겠다는 계획은 2년이면 무효가 된다. 모두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이겨야 할 곳은 따로 있다. 설계에서는 AI로 이 땅에서만 나오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감리에서는 AI로 빠짐없는 검측과 닫힌 기록을 남긴다. 그 둘이 쌓이면 이름이 된다.
스타 건축사와 이름 없는 건축사 사이의 거리는 재능의 거리가 아니다. 로젠이 말한 대로 작은 차이가 증폭된 결과다. 증폭 장치는 시대마다 달랐다. 인쇄기가 그랬고 잡지와 인터넷이 그랬다. 이번에는 AI다. 증폭 장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증폭되는 것은 이미 거기 있던 것뿐이다. 무엇을 거기 둘지는 건축사가 정한다.
이름 없는 건축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전략이 아니다. 다음 첫 미팅에 이 땅으로 만든 대안 세 개를 들고 가는 것, 다음 현장에서 검측 항목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시각과 좌표를 남기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자기 이름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스타 건축사가 수십 년에 걸쳐 쌓은 이름을 한 번에 따라잡을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 이름이 쌓인 방식은 따라 할 수 있다. 준공된 건물, 남은 기록, 지켜진 약속. AI는 그 축적의 속도를 바꾼다.


참고자료
1. 건축공간연구원(AURI), 「건축서비스산업 실태조사」 (2023년 기준: 사업체 31,476개, 종사자 274,351명, 매출 43조 5,000억 원)
2.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소규모 건축사사무소, 건축사법인 제도 도입으로 위기 극복」 (2026. 7. 6.) — 정회원 17,701명, 1인 건축사 11,679명
3.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규모가 아니라 연결의 힘이 경쟁력을 만든다①」 — 미국·독일 사무소 규모 국제 비교
4.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건축사 10명 중 9명 AI 교육 원한다」 (2026. 8. 28.) — 협회 AI위원회 설문(2026. 7. 22.~29.), 정회원 16,750명 중 763명 응답
5. 대한건축사협회 건축사신문, 「민간발주 합리적 대가기준 마련해 건축산업 양질의 서비스 기반 선순환 구조 만들어야」 (2023. 10. 17.) — 민간건축물 97.2%, 수의계약 77.6%, 민간 설계대가 공사비의 0.4%
6. Sherwin Rosen, “The Economics of Superstars,” American Economic Review, Vol. 71, No. 5 (Dec. 1981), pp. 845–858
7. Erik Brynjolfsson, Danielle Li & Lindsey Raymond, “Generative AI at Work,” NBER Working Paper No. 31161 (2023);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Vol. 140, No. 2 (2025), pp. 889–942
8. Fabrizio Dell'Acqua et al., “Navigating the Jagged Technological Frontier: Field Experimental Evidence of the Effects of AI on Knowledge Worker Productivity and Quality,” Harvard Business School Working Paper 24-013 (2023)
9. Anil R. Doshi & Oliver P. Hauser, “Generative AI enhances individual creativity but reduces the collective diversity of novel content,” Science Advances, Vol. 10, No. 28 (2024. 7. 12.), DOI 10.1126/sciadv.adn5290
10. 건축법 제2조 제1항 제15호(공사감리자의 정의), 제25조(건축물의 공사감리)
11. 건축사법 제19조(건축사업무), 제23조(건축사사무소개설신고 등) — 설계도서 서명·날인의 법적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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