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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기록하는 시대, 시공기술사는 무엇으로 업역을 얻는가

10월 7일
12분 분량

AI가 기록하는 시대, 시공기술사는 무엇으로 업역을 얻는가



손 안의 AI에서 미래 도시까지, 기술사회가 짜야 할 큰 프레임



판단은 그가 하고 계약은 다른 이름이 한다


감리는 한다. 감리자는 못 된다.


현장 하나를 떠올려 보자. 이십 년 차 건축시공기술사가 아침 일곱 시에 슬래브 위로 올라간다. 철근 간격을 재고 개구부 보강을 확인한 뒤 타설을 미루라고 말한다. 시정 지시서도 그가 쓴다. 그런데 감리계약서의 감리자 칸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거기에는 건축사사무소나 건설엔지니어링회사의 이름이 적힌다.


2026년 8월 27일 헌법재판소는 이 구조에 손을 대지 않았다. 건축시공기술사에게 공사감리자와 해체공사감리자 자격을 주지 않는 건축법과 건축물관리법 조항을 다툰 헌법소원을 기각했다.[1] 감리원으로 일하는 길은 그대로다. 감리자로 계약하는 길은 열리지 않았다.


넉 달 전에는 다른 소식이 있었다. 4월 15일 고용노동부가 기술사 응시에 필요한 경력을 줄이는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대로면 기사를 딴 뒤 4년이던 요건은 2년으로, 경력만으로 9년이던 요건은 7년으로 준다. 2010년 이후 16년 만의 개편이다.[2] 한국기술사회가 반대 의견서를 내는 등 반발이 이어졌다.[3]


들어오는 문은 넓어지고 나가는 문은 닫혔다. 여기에 AI가 겹친다. 검측 사진을 정리하고 음성을 받아 적는 일은 이제 앱이 한다. 기록하느라 현장을 지키던 시간의 값이 내려간다.

기술사 쪽에서는 두 싸움이 벌어졌다. 한 사람은 감리자 자리를 열라고 헌법소원을 냈고 단체들은 시험 문턱을 지키라고 의견서를 냈다. 둘 다 이미 쓰인 조문을 놓고 벌인 싸움이다. 조문에서 막힌 업역을 그 조문에서만 찾아야 하는가.



자리값 위에 AI를 얹으면 단가만 내려간다


소하일 이나야툴라의 미래삼각형(Futures Triangle)은 미래를 세 힘의 줄다리기로 읽는다. 과거가 붙잡는 무게, 현재가 미는 힘, 미래가 끌어당기는 힘이다.[4] 무엇이 발목을 잡고 무엇이 끌어당기는지를 한 장에 올려놓는 도구다.

과거의 무게는 자리값이다. 자격증이 판단의 값이 아니라 자리를 채우는 값으로 팔려 온 관행이다. 건축법 시행령은 허가 대상 건축물의 공사감리자를 건축사로 정한다. 다중이용 건축물은 건설엔지니어링사업자나 건설사업관리기술인을 배치한 건축사가 맡는다.[5] 토목 쪽 사정도 닮았다. 발주청 공사의 건설사업관리는 등록한 건설엔지니어링사업자가 계약한다.[6] 시공기술사는 그 회사의 기술인 명단에 들어가 배치 요건 한 칸을 채운다.


법이 어긋나 보이는 대목도 있다. 기술사법 제3조는 기술사의 직무에 시공과 감리, 사업관리와 기술판단을 나란히 적어 놓았다.[7] 직무에는 감리가 있고 계약서에는 이름이 없다. 같은 기술사 안에서도 사정이 다르다. 건축구조기술사에게는 일정한 건축물의 구조 안전을 확인하고 서명하는 법정 자리가 있다.[5] 시공기술사에게는 자기 이름으로 서명하는 고유한 자리가 드물다. 감리자 자리가 막힌 충격이 시공 종목에서 가장 큰 이유다.

현재의 힘은 셋이다. 헌재 결정은 자리를 넓히는 길을 막았다. 응시 요건 완화는 자리에 앉을 사람을 늘린다. AI는 그 자리에서 하던 기록 일을 줄인다. 셋 다 같은 곳을 누른다. 자리값이다.


미래의 힘은 도시에서 온다. 낡은 신도시를 사람이 사는 채로 고친다. 철길을 땅 밑으로 내리고 그 위에 도시를 올린다. 공장에서 만든 집을 현장에서 조립한다. 도시가 바뀌면 짓는 방법이 바뀐다. 짓는 방법을 아는 사람의 자리가 거기서 새로 생긴다.


■ 미래삼각형으로 읽는 시공기술사의 대응

세 힘은 동시에 움직인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하다. 자리값 관행을 그대로 두고 AI만 얹으면 기록이 빨라진 만큼 배치 인원이 줄고 단가가 내려간다. 판단을 납품물로 바꾸고 번 시간을 미래의 일에 넣어야 다른 길이 열린다. 삼각형은 업역 확대를 보장하는 공식이 아니다. 어느 꼭짓점에 무게를 실을지 묻는 질문이다.



실력으로는 못 넘는 문턱이 있다


결정을 다시 읽어 보자. 보도에 따르면 헌재는 감리를 설계·시공·안전관리·관계 법령·행정 실무를 아우르는 종합 업무로 봤다. 건축시공기술사는 시공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라고 했다.[1] 시공 실력이 모자라다는 말은 없다. 감리가 요구하는 폭이 다르다는 말이다.


헌재는 한 가지를 더 짚었다. 건축사법은 부실공사로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자격을 취소하도록 하는 등 책임을 담보하는 규정을 두었다. 건축시공기술사에게는 그에 견줄 규정이 미비하다고 했다. 감리 교육을 따로 받는 것만으로는 메워지지 않는다고도 했다.[1]


이것을 책임의 빈칸이라고 부르자. 자격을 걸고 책임지는 장치가 비어 있다는 뜻이다. 업역은 실력에만 붙지 않는다. 책임에 붙는다. 사회는 잘하는 사람보다 잘못됐을 때 책임질 사람에게 자리를 준다.


그러면 경력 연수를 지키는 싸움도 다시 보인다. 응시 요건 완화에 반대한 한국토목구조기술사회의 의견서에는 대안이 하나 들어 있다. 기술사의 직접 지도 아래 수행한 책임 있는 경력만 인정하자는 것이다.[3] 햇수가 아니라 책임의 질을 보자는 제안이다. 방어 논리 속에 공격의 실마리가 있었다.


폭은 협업으로 메우고 책임은 구조로 메운다. 조문은 그 뒤에 따라온다.



드론과 로봇은 기술사의 도구가 아니다


스마트건설이라고 하면 드론과 로봇이 먼저 떠오른다. 국토교통부는 2022년 7월 스마트 건설 활성화 방안을 내놓고 2030년까지 건설 전 과정을 디지털화·자동화하겠다고 했다. 건설정보모델링(BIM) 의무화와 탈현장 건설(OSC), 건설기계 자동화가 기둥이다.[8] 전시장의 주인공도 늘 날아다니는 것과 걸어 다니는 것이다.


따져 보자. 드론은 측량하고 촬영한다. 로봇은 철근을 묶고 용접하고 칠한다. 자동화 장비는 땅을 고른다. 모두 기능 인력의 손이 하던 일이다. 이 기술들은 기능공의 일을 바꾸고 장비를 다루는 새 기능 인력을 만든다. 기술사 본인이 하던 일은 그대로 남는다.


기술사의 일은 손으로 하지 않는다. 손 안에서 한다. 시공계획서를 쓰고 공정표를 짠다. 검측하고 작업일보를 확인하고 기성을 검토한다. 설계 변경을 따지고 안전과 품질 서류에 서명한다. 서류와 판단이다. 이것을 손 안의 일이라고 부르자.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의 2025년 조사에서 건설기업의 87%는 현장 기술인력 부족이 중장기로 이어진다고 답했다. 원인으로는 청년층의 진입 부족과 함께 현장 업무의 증가가 꼽혔다.[9] 사람은 줄고 일은 는다. 현장에 있어 본 기술자라면 그 일의 큰 몫이 서류라는 것을 안다. 드론이 아무리 날아도 이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로봇이 들어올수록 기술사의 일은 오히려 는다. 로봇이 묶은 철근도 누군가 검측한다. 자동화 장비가 고른 땅도 누군가 합격을 판정한다. 기계가 빨라질수록 확인할 양이 늘고 확인의 속도가 병목이 된다.


손을 대신하는 기술과 머리를 돕는 기술은 다른 기술이다. 앞의 것은 회사가 사고 뒤의 것은 기술자가 익힌다. 기술사가 적응해야 할 것은 뒤쪽이다. 로봇을 구경하는 동안 손 안의 일은 어제와 같은 방식으로 쌓인다.



프로세스가 없는 현장에 AI를 넣으면 혼란만 빨라진다


AI를 쓰려면 일이 먼저 정리돼 있어야 한다. 누가 무엇을 확인하고 어디에 남기며 누구에게 넘기는지가 현장마다, 사람마다 다르다. 메신저의 사진과 손으로 쓴 점검표, 엑셀 일보가 따로 논다. 그 위에 AI를 얹으면 뒤섞인 자료가 더 빨리 뒤섞인다.


월요일 아침 현장 사무실을 보라. 검측 요청은 메신저로 오고 사진은 각자의 휴대전화에 있다. 지난주에 지적한 곳이 고쳐졌는지는 지적한 사람의 기억에 있다. 일보는 저녁에 몰아 쓰고 주간 보고서는 금요일에 다시 옮겨 적는다. 같은 사실을 세 번 쓰는데 정작 이어진 줄은 어디에도 없다.


먼저 할 일은 도구 구매가 아니다. 자기 현장에서 확인 하나가 어떤 길을 거쳐 서류가 되는지 그려 보는 일이다. 겹쳐 쓰는 곳과 끊기는 곳이 보인다. AI는 그 끊긴 곳에 넣는다.


정리할 것은 고리다. 사진을 수백 장 남겨도 소용없을 때가 있다. 어디를 왜 봤는지, 고치라고 한 곳이 고쳐졌는지가 이어져 있지 않으면 그것은 사진첩이다. 현장 관리는 계획과 확인, 기록과 시정 요청, 재확인이 한 줄로 이어진 고리다. 재확인까지 끝나야 고리가 닫힌다. 이것을 닫힌 고리라고 부르자.

고리가 정리되면 AI가 들어갈 자리가 보인다. OpenSpace의 안내에는 음성 메모를 받아 적고 설명·담당자·기한 같은 항목을 채워 주는 기능이 소개돼 있다. 채워진 내용은 사용자가 확인하라는 단서도 붙어 있다.[10] 받아쓰기는 앱의 일이고 확인은 사람의 일이다.


■ 기술사의 손 안에서 AI가 덜 일과 사람이 쥘 일

표의 오른쪽 칸이 시공기술사의 자리다. 앱은 사진과 도면을 대조한다. 그 공정에서 무엇이 틀어지기 쉬운지는 지어 본 사람이 안다. 타설 순서가 바뀌면 이음부가 어디에 생기는지 안다. 동바리를 언제 풀어야 처짐이 남지 않는지, 창호 주변 방수가 어느 공종 사이에서 빠지는지 안다. 무엇을 찍을지 정하는 사람과 찍힌 것을 정리하는 도구는 다르다.


AI가 아무것도 표시하지 않았다는 것과 문제가 없다는 것은 다르다. 사진에는 가림과 각도가 있고 내부 상태는 찍히지 않는다. 서류는 도구에 넘기고 번 시간은 다음 공정의 위험을 미리 읽는 데 쓴다. 그 판단을 자기 이름으로 남긴다. 자리값이 판단값으로 바뀌는 지점이 여기다.

적응은 구경으로 되지 않는다. 자기 서류 하나를 AI에게 맡겨 보고 틀린 곳을 찾아 고쳐 봐야 한다. 어디서 틀리는지 아는 사람이라야 어디까지 맡길지 정한다.


경험도 정리해야 밑천이 된다. 응시 문턱이 낮아지면 젊은 기술사가 는다. 이십 년의 현장이 머릿속에만 있으면 등급표의 한 줄이다. 지난 현장의 시공계획과 지적 사항, 고친 상세와 실패한 공법을 프로젝트별로 정리해 두면 AI가 꺼내 쓰는 자료가 된다. AI는 누구나 쓴다. 정리된 경험은 그 사람만 쓴다.



기술자의 AI는 쓰는 사람이 정한다


기술자를 돕는 AI에는 갖출 것이 있다. 답의 근거를 보여 줘야 한다. 어느 도면, 어느 시방 조항, 어느 날의 사진에서 나온 말인지 따라갈 수 있어야 기술사가 검증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한다. 그럴듯한 숫자를 지어내는 도구에는 서명을 걸 수 없다. 누가 언제 무엇을 확인했는지 남아야 하고 현장 자료가 밖으로 새지 않아야 한다. 판단은 사람 몫으로 남겨 둬야 한다.


이 요건을 누가 정하는가. 영국왕립측량사협회(RICS)는 2025년 9월 AI 사용 기준을 내고 2026년 3월 9일부터 모든 회원과 규제 대상 회사에 의무로 적용했다. AI 결과물의 신뢰성을 평가하고 모든 업무에 책임을 지라고 했다. AI를 언제 어떻게 쓰는지 고객에게 서면으로 알리라고도 했다.[11] 도구를 만든 회사가 아니라 도구를 쓰는 전문가 단체가 기준을 썼다.


기술사의 현장에도 같은 물음이 온다. AI가 쓴 검측 기록에 누가 서명하는가. 틀렸을 때 누가 책임지는가. 답을 정해 두지 않으면 일은 편한 쪽으로 흐른다. 서명은 사람이 하고 확인은 아무도 하지 않는 쪽이다. 책임의 빈칸이 하나 더 생긴다.

발주자의 기술사가 되어 값을 받는다


손 안의 일이 가벼워지면 시간이 남는다. 그 시간을 어디에 쓸 것인가. 감리원 자리의 수는 그대로다. 응시 요건이 풀리면 그 자리를 두고 겨룰 사람은 더 늘어난다. 자리를 지키는 싸움 옆에 시장을 여는 싸움이 있어야 한다. 가까운 곳부터 보자. 발주자다.


감리자는 법이 정한 자리다. 발주자의 기술자문은 계약이 정하는 자리다. 기술사법이 적어 놓은 직무 가운데 사업관리와 기술판단, 기술자문은 감리자 지정을 기다리지 않는다.[7] 건축주 편에 서서 시공을 읽어 주는 일이다.


작은 건물을 처음 짓는 건축주를 생각해 보라. 견적서 세 장을 받아도 무엇이 빠졌는지 모른다. 공정표를 받아도 석 달이 가능한 숫자인지 모른다. 기성 청구서가 와도 그만큼 지어졌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설계자는 도면을 책임지고 시공자는 자기 이익을 본다. 건축주 편에서 시공을 아는 사람이 비어 있다.


바깥에서는 이 자리가 제도 안에 들어와 있다. 미국 버지니아주 건축기준은 공사 중 특별검사를 맡을 검사원을 건축주가 고용하게 하고 그 검사원은 시공 책임자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정한다.[12] 영국은 건축주에게 의무를 지웠다. 사업이 기준에 맞도록 계획하고 관리하고 점검할 체계를 건축주가 갖춰야 한다. 일을 맡는 사람은 기술과 지식, 경험과 태도를 갖춰야 한다.[13] 건축주에게 책임이 생기면 건축주 편의 기술자가 필요해진다.


팔 것은 공사의 단계를 따라간다. 계약 전에는 견적과 공사비, 공정표의 타당성을 검토한다. 착공 전에는 시공계획과 가설, 공법의 위험을 짚는다. 공사 중에는 기성과 주요 공정을 확인하고 준공 전에는 인수 점검을 한다. 선은 분명히 긋는다. 법이 정한 감리자의 권한을 대신하지 않는다. 현장에 지시하는 사람이 둘이 되면 책임이 흐려진다. 발주자의 기술사는 건축주에게 보고하고 결정은 건축주가 한다.



분쟁이 되기 전에 원인을 읽어 준다


다음은 분쟁이다. 국토교통부 발표를 보면 2021년부터 2026년 2월까지 하자심사분쟁조정위원회의 하자 심사 10,911건 가운데 7,448건이 하자로 판정됐다. 68.3%다. 유형은 기능 불량이 18%, 들뜸과 탈락이 15.1%, 균열이 11.1%, 결로가 9.9%였다.[14]


이 숫자는 준공 뒤에 세어진다. 원인은 공사 중에 생긴다. 균열을 보면 양생과 타설 순서를 먼저 의심한다. 들뜸은 바탕 처리를, 결로는 단열이 끊긴 자리를 의심한다. 그 인과를 가장 잘 읽는 사람이 시공기술사다. 지어 본 사람이라야 어디서 틀어졌는지 거슬러 올라간다.


분쟁은 하자에서만 나지 않는다. 공기가 늘면 누구 탓인지를 가려야 하고 공사비가 늘면 추가 공사인지 원래 범위인지를 가려야 한다. 공정표와 작업일보, 기성 내역과 변경 지시를 맞춰 보는 일이다. 변호사는 법리를 세우고 기술사는 사실을 세운다. 사실이 서지 않으면 법리는 설 곳이 없다.


기술사법은 기술판단에 기술감정을 포함하고 기술중재도 직무로 적었다.[7] 법원의 감정과 조정·중재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더 큰 시장은 소송 이전에 있다. 하자 원인 진단, 보수 공법과 범위의 판단, 공기 지연 분석, 추가 공사비 검증이다. 다투기 전에 사실을 정리해 주면 다툴 일이 줄어든다.

여기서도 닫힌 고리가 밑천이다. 공사 중에 남긴 확인과 시정의 기록이 있으면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짧아진다. AI는 도면과 사진, 일보와 공정표의 어긋남을 찾아 준다. 그 어긋남이 하자의 원인인지는 사람이 판단하고 그 판단에 서명한다. 선도 긋는다. 계약 해석과 책임 비율은 법률가의 일이고 가격의 감정평가는 감정평가사의 일이다.



미래 도시는 지을 방법을 말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


발주자와 분쟁은 기술사 한 사람이 지금 열 수 있는 시장이다. 더 큰 판은 따로 있다. 도시다.


도시의 숙제는 이미 법이 됐다. 2024년 4월 노후계획도시 정비 특별법이 시행됐다. 조성한 지 20년이 지난 100만㎡ 이상 택지가 대상이다.[15] 2025년 1월에는 철길을 땅 밑으로 내리고 그 부지를 함께 개발하는 철도지하화통합개발법의 하위법령이 시행됐다.[16] 같은 해 11월 정부는 OSC·모듈러 특별법 제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17] 국토교통부의 기반시설 실태조사에서는 시설물 38만 3,281개 가운데 지은 지 30년이 넘은 것이 9만 6,753개, 25.2%였다.[18]

넷을 나란히 놓아 보라. 설계의 문제로 보이지만 막히는 곳은 시공이다.


신도시 재정비부터 보자. 한 단지를 비우고 새로 짓는 재건축과 다르다. 옆 단지에는 사람이 살고 학교와 상가는 문을 연다. 이주와 해체, 임시 도로와 공사 차량의 동선을 몇 해에 걸쳐 짜야 한다. 순서가 틀리면 동네가 멈춘다. 이 순서를 짜는 일이 시공계획이다.


지하화도 그렇다. 열차를 세우지 않고 그 옆과 아래를 판다. 흙막이와 계측, 야간 작업과 운행선 보호가 사업의 성패를 가른다. 모듈러는 현장의 일을 공장으로 옮기지만 판단까지 옮기지는 못한다. 공장에서 맞던 치수가 현장의 기초 위에서 어긋나면 접합부가 약한 고리가 된다. 낡은 시설물은 예산이 늘 모자란다. 무엇부터 고치고 무엇을 더 버티게 할지를 가르는 것이 공법의 판단이다.

과제가 하나 더 있다. 눈에 덜 띄는 것, 기록이다. 고쳐 쓰는 도시는 건물마다 이력을 요구한다. 어디에 무엇이 묻혀 있고 언제 무엇을 고쳤는지 모르면 다음 공사는 뜯어 보는 데서 시작한다. 공사 중에 닫아 놓은 고리가 준공 뒤에는 건물의 이력이 된다. 그 기록을 도시가 쓸 자료로 넘겨주는 기준은 현장에서 기록을 만든 사람들이 정해야 한다.


미래 도시의 조감도는 많다. 그 그림이 지어지는지, 어떤 순서로 얼마 동안 얼마에 지어지는지를 책임지고 말해 주는 자리는 비어 있다. 이것을 시공의 자리라고 부르자. 도시는 설계로 그려지고 시공으로 실현된다. 그리는 사람은 많고 지을 방법에 이름을 거는 사람은 적다.


■ 미래 도시의 과제와 기술사가 정의할 업역

미래 도시 모델을 말하는 자리에서 시공 전문가의 목소리는 작다. 스마트시티와 탄소중립 도시의 그림은 계획하는 사람과 설계하는 사람이 그린다. 그 그림에서 공기와 공사비, 공사 중의 안전과 불편은 빠지기 쉽다. 빠진 것은 나중에 시민이 치른다. 그 자리에 앉겠다고 먼저 손을 드는 것이 업역의 시작이다.


여기에 헌재 결정이 남긴 교훈이 겹친다. 이미 쓰인 조문은 고치기 어렵다. 건축법의 감리자 조항이 그랬다. 아직 쓰이지 않은 조문에는 들어갈 틈이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은 OSC·모듈러 특별법이 설계·감리·품질관리의 법적 기준을 새로 세우는 방향으로 검토되고 있다고 전한다.[17] 기준이 쓰이는 자리에서 역할도 함께 정해진다.


선례도 있다. 건축물관리법은 허가 대상 해체공사의 해체계획서를 건축사나 해당 직무범위를 등록한 기술사가 작성하고 서명하게 한다. 같은 법의 해체공사감리자는 건축사법이나 건설기술 진흥법에 따른 감리자격이 있는 자 가운데서 지정한다.[19] 이번 헌법소원은 이 감리자 자리도 다퉜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한 법 안에서도 칸마다 결과가 달랐다. 자리는 조문이 쓰일 때 갈린다.



업역은 혼자서 못 연다


듣기 좋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지금까지 말한 일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기술사 한 사람의 실력으로는 열리지 않는다.


발주자 편 검증은 법이 사라고 시키지 않는 서비스다. 감리는 법정 의무라서 팔린다. 발주자 자문은 건축주가 돈을 낼 이유를 스스로 찾아야 팔린다. 업무 범위와 대가를 적어 둔 표준이 없으면 계약마다 처음부터 설명해야 한다. 건축주는 견줄 잣대가 없어 가격만 본다. 자리값 경쟁이 자문값 경쟁으로 이름만 바뀐다.


책임의 빈칸도 그대로 따라온다. 틀려도 잃을 것이 없는 자문에는 높은 값이 붙지 않는다. 서명의 무게는 그 서명에 걸린 것에서 나온다. 배상 책임을 담보할 보험과 판단이 틀렸을 때의 징계가 있어야 한다. 헌재가 짚은 바로 그 자리다.


AI도 혼자서는 반쪽이다. 도구는 개인이 산다. 표준은 개인이 못 만든다. 현장 관리의 고리가 회사마다 다르고 자료의 형식이 제각각이면 기술사는 현장을 옮길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야 한다. 기술자의 판단을 돕는 AI가 무엇을 갖춰야 하는지도 정해 준 곳이 없다. 쓰는 사람이 요건을 말하지 않으면 만드는 회사가 정한다.


AI에 익숙해지는 일에도 위험이 따른다. 초안이 그럴듯할수록 확인은 느슨해진다. 서류는 빨라졌는데 현장에 나가는 시간이 늘지 않으면 판단은 오히려 얕아진다. 번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 재지 않으면 AI는 서류만 늘린다.


미래 도시는 더하다. 특별법의 하위 기준이 쓰이는 회의에 기술사 한 사람이 들어갈 길은 없다. 또 하나의 업역 다툼으로 번질 위험도 있다. 건축사의 일과 겹치는 것을 다른 이름으로 가져오려 하면 같은 싸움이 다시 시작된다. 길은 반대쪽에 있다. 건축사에게는 자리가 있고 현장이 멀다. 시공기술사에게는 현장이 있고 자리가 없다. 두 빈칸은 서로 맞물린다. 그 맞물림을 제도의 말로 옮길 주체가 필요하다.



사업 몇 건이 아니라 큰 프레임을 짜야 한다


그 주체가 기술사회다. 조문을 바꿔 달라는 요구는 헌재에서 답을 들었다. 문턱을 지켜 달라는 요구는 수비다. 시범사업 몇 건이나 지원 사업을 따내는 것으로도 판은 바뀌지 않는다. 사업이 끝나면 실적은 남아도 방향은 남지 않는다. 예산으로 도는 일은 예산이 끊기면 멈춘다. 제도에 들어간 역할은 예산과 상관없이 남는다. 기술사회가 할 일은 방향과 의제를 세우고 그것을 들고 정책 제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출발점은 선언이다. 미래 도시 모델을 놓고 기술사의 역할을 한 장으로 정의한다. 도시를 고쳐 쓰는 시대에 시공기술사는 지을 방법과 순서, 공기와 위험을 책임지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 한 문장이 서야 교육도 자격도 정책 제안도 같은 쪽을 본다. 종목별 단체가 따로 움직이면 정부는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른다.


프레임은 질문 넷으로 짠다. 미래 도시에서 기술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그 일에 무엇을 걸고 책임지는가. 그 일을 어떤 프로세스와 도구로 하는가. 그 일의 값은 무엇을 기준으로 정하는가. 역할과 책임, 방법과 대가다.

역할은 기술사회가 먼저 정의한다. 노후 도시 정비와 지하화, 탈현장 건설과 낡은 시설물에서 시공 전문가가 맡을 일을 과제별로 적는다. 어느 단계에서 무엇을 검토하고 어떤 문서에 서명하는지까지 적는다. 남이 정의해 준 역할은 다시 자리값으로 돌아간다. 스스로 정의한 역할이라야 업역이 된다.


책임은 스스로 짓는다. 부실한 판단에 자격을 거는 윤리·징계 기준을 세우고 배상책임보험을 갖춘다. 경력은 햇수가 아니라 책임 있게 수행한 실적으로 검증한다. 응시 요건 논쟁에서 기술사 단체가 내놓은 바로 그 대안이다.[3] 헌재가 짚은 빈칸을 먼저 채운 쪽이 다음 조문에서 자리를 얻는다.


방법은 표준으로 만든다. 현장 관리의 닫힌 고리를 표준 프로세스로 정리한다. 기술자의 손 안의 일을 돕는 AI가 갖출 요건을 정한다. 무엇을 AI에 맡기고 무엇에 사람이 서명하는지, 현장 자료를 어떻게 보호하고 넘겨주는지 지침으로 쓴다. 기술사는 등록을 갱신하려면 교육훈련을 받아야 한다.[7] 그 과정에 손 안의 AI를 넣는다. 교육은 도구 시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같은 서류를 놓고 AI가 어디서 틀렸는지 찾아내는 훈련까지 간다.


대가는 근거로 말한다. 발주자 기술자문과 시공성 검토의 표준 업무범위를 정하고 실제로 든 시간과 비용을 모은다. 기준 없는 서비스에는 예산이 붙지 않는다.


이 넷을 들고 정책 제안으로 들어간다. 국토교통부에는 정비계획과 통합개발, 탈현장 건설의 기준에 시공성 검토와 시공 전문가의 역할을 넣자고 제안한다. 기술사 제도를 맡은 부처에는 책임 규정과 경력 검증의 개편을 제안한다. 국회에는 조문의 말로 옮긴 안을 낸다. 제안서의 주어는 회원이 아니라 시민이다. 공기와 공사비, 안전과 하자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적는다. 일감을 달라는 제안은 청원이고 도시의 문제를 풀겠다는 제안이 정책이다.


제안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의제를 고른다. 모든 과제를 한꺼번에 올리면 힘이 흩어진다. 도시의 수요가 분명하고 회원이 해 본 일부터 올린다. 다음에 역할 정의서를 쓴다. 어느 단계에서 누가 무엇을 검토하고 서명하는지를 조문으로 옮길 만한 말로 적는다. 그다음이 근거다. 회원들이 현장에서 잰 시간과 비용, 막은 사고와 줄인 공기를 모은다. 마지막으로 부처와 국회의 일정에 맞춰 안을 낸다.


건축사 단체와의 관계도 프레임 안에 넣는다. 감리자 자리를 나눠 달라는 요구를 미래 도시의 과제를 함께 풀자는 제안으로 바꾼다. 설계 의도를 지키는 일과 지을 방법을 검증하는 일은 겹치지 않는다. 역할이 갈리면 협업이 되고 겹치면 다툼이 된다.

때도 있다. 특별법의 하위 기준과 지침이 쓰이는 지금이다. 기준이 굳은 뒤에 남는 길은 다시 헌법소원뿐이다.



개인은 90일, 손 안의 서류 하나부터


기술사회가 프레임을 짜는 동안 개인이 기다릴 이유는 없다. 첫 일은 최근 현장 하나를 다시 뜯어보는 것이다. 자기가 내린 판단을 적는다. 순서를 바꾸라고 한 곳, 공법을 바꾸라고 한 곳, 타설을 미룬 날이다. 그 판단이 무엇을 막았는지 옆에 적는다. 등급표 한 줄이던 경력이 판단의 목록으로 바뀐다.


다음은 90일이다. 손 안의 서류 하나를 고른다. 검측 기록이어도 좋고 시공계획서 검토여도 좋다. 첫 30일에는 그 일의 고리를 정리한다. 누가 무엇을 확인하고 어디에 남기는지 적고 지금 드는 시간과 놓친 항목을 잰다. 다음 30일에는 실제 현장에서 AI에게 초안과 대조를 맡기고 결과를 자기 손으로 검증한다. 마지막 30일에는 전체 시간과 품질, 발주자의 반응을 확인한다. 성과를 보장하는 기한이 아니라 실험의 단위다.

도구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휴대전화의 받아쓰기와 문서 AI 하나면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틀린 곳을 적어 두는 일이다. AI가 시방 조항을 잘못 끌어온 곳, 사진의 위치를 틀리게 읽은 곳을 모은다. 그 목록이 자기만의 검증 기준이 된다.


새 서비스도 하나부터 판다. 견적·공정 검토, 하자 원인 진단, 보수 공법 판단 가운데 자기 경험과 고객의 결정에 맞는 것을 고른다. 실제로 팔리는지, 수행 비용이 얼마인지 확인한 뒤 범위를 넓힌다. 그 기록을 기술사회로 보낸다. 개인이 잰 시간과 비용이 표준 업무범위와 대가 기준의 근거가 된다. 프레임은 위에서 짜고 근거는 아래에서 올라온다.



업역은 책임질 자리를 먼저 그린 쪽이 얻는다


미래삼각형으로 돌아가자. 과거에서는 자리값을 버린다. 현재에서는 서류를 도구에 넘기고 판단을 손에 쥔다. 미래에는 도시가 요구할 시공의 자리를 그려 넣는다. 자동화가 깊어질수록 남는 것은 판단하고 책임지는 사람이다.


AI가 기록을 대신 쓴 뒤 당신의 이름으로 남는 판단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는 기술사 한 사람이 답한다. 그 답에 자리를 내줄 도시는 한 사람이 그리지 못한다.


기술사 집단의 리더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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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시아경제, 「최상위 자격 '기술사' 16년 만에 문턱 낮춘다…경력요건 최대 4년 단축」, 2026.4.15. https://view.asiae.co.kr/article/2026041508225004464


[3] 한국건설신문, 「기술사 응시자격 실무경력 단축 입법… ‘반발 확산’」, 2026. http://www.conslove.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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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파이낸셜뉴스, 노후계획도시정비특별위원회 출범 보도, 2024.5.17. https://www.fnnews.com/news/202405161821527802


[16] 뉴스서울, 「국토교통부, 역세권 고밀 복합개발 본격화… '철도지하화통합개발법' 하위법령 1월 31일 시행」, 2025.1.31. https://newsseoul.co.kr/news/view/1065570016241614


[17] 박희대, 「OSC·모듈러 활성화 정책 동향과 제언」,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건설동향브리핑 제1032호, 2025.11.21. https://www.cerik.re.kr


[18] 대한전문건설신문, 「전국 인프라의 25%, 30년 넘긴 노후시설…‘안전등급 최하’ 69개」(국토교통부 기반시설 실태조사), 2024.1.30. https://www.koscaj.com/news/articleView.html?idxno=305546


[19] 건축물관리법 제30조(건축물 해체의 허가), 제31조(건축물 해체공사감리자의 지정 등). 국가법령정보센터 https://www.law.go.kr/법령/건축물관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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