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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는 이미 AI에게 물어보고 온다

11분 전
9분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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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는 이미 AI에게 물어보고 온다



설계 상담의 권력 이동 — 정보를 팔던 자리에서 책임을 파는 자리로


건축사·건설분쟁 실무자를 위한 전문 블로그 · 2026. 10. · 주식회사 씨엠엑스 이기상


목차


1. 첫 미팅 전에 끝나 있는 사전 검토


2. 정보 비대칭이 무너진 시장의 설계비


3. AI의 오답을 정정하는 일이 새 업무가 된다


4. 상담자에서 검증자로: 건축사의 자리 이동


5. 신뢰는 정보가 아니라 책임에서 나온다


건축주는 AI에게 먼저 묻고 상담실에 온다. 사전 검토는 첫 미팅 전에 끝나 있고, 건축사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나온 답을 검증하는 사람이 됐다. 정보가 공짜가 된 시장에서 설계비는 무엇을 사는가. 이 글은 선행 답안, 정정 노동, 서명의 값이라는 세 개념으로 설계 상담의 권력 이동을 해부한다.



상담실에 건축주보다 답이 먼저 도착한다.


첫 미팅 자리에서 건축주가 휴대폰을 내민다. 화면에는 대지 주소와 용도지역, 예상 연면적, 평당 공사비가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생성형 AI가 30초 만에 만들어 준 사전 검토서다. 건축사는 명함을 건네기도 전에 질문부터 받는다. "이대로 지을 수 있습니까?"


의사들은 이 장면을 먼저 겪었다. 검색창에서 병명을 찾아 들고 오는 환자를 두고 '닥터 구글 환자'라는 말까지 생겼다. 이제 건축 상담실에서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검색 결과는 링크 목록이었지만 AI의 답은 완성된 문장이다. 문장이 완결될수록 건축주의 확신은 단단해진다.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건축주가 많이 알수록 건축사의 일은 줄지 않는다. 오히려 늘어난다. 다만 건축사가 파는 물건이 바뀐다. 이 글은 그 이동을 다섯 장면으로 따라간다. 사전 검토가 첫 미팅 전에 끝나는 현실, 무너진 정보 비대칭과 설계비, 오답을 고치는 새 노동, 검증자로 옮겨 가는 건축사의 자리, 그리고 끝내 남는 책임의 문제다.



1. 첫 미팅 전에 끝나 있는 사전 검토


숫자부터 보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2025 인터넷이용실태조사」에서 생성형 AI를 써 본 국민은 44.5%였다. 1년 전 33.3%에서 11.2%포인트 뛰었다. 국민 절반 가까이가 써 본 도구를, 수억 원짜리 결정을 앞둔 건축주가 건너뛸 리 없다. 집을 지으려는 사람은 평균보다 절박하고 평균보다 많이 묻는다.

해외 상담실도 같은 풍경이다. 영국왕립건축협회(RIBA)는 2026년 7월 주택 프로젝트 특집에서 건축주가 AI로 만든 이미지와 무드보드, 콘셉트 안을 들고 첫 미팅에 온다고 짚었다. 브리프가 건축사를 만나기 전에 이미 짜여 있다는 뜻이다. RIBA는 건축사의 역할이 시각 자료를 쥐고 있던 자리에서 AI가 낸 아이디어를 현실 조건에 비춰 보는 '신뢰받는 조언자'로 옮겨 가고 있다고 정리했다.


시장은 이미 가격표를 붙였다. 국내 온라인 재능 거래 플랫폼에는 대지 지번과 예산을 받아 법적 규모 검토와 계획 평면 초안을 내주는 상담 상품이 3만 3천 원부터 올라와 있다. 사전 검토라는 업무가 몇만 원짜리 상품이 됐고, 그 가격은 0원을 향해 내려간다. AI는 같은 일을 무료로, 새벽 2시에도, 몇 번이고 다시 해 준다.

■ 숫자로 본 '먼저 묻고 오는' 시장

표는 비대칭이 어느 쪽으로 기울었는지 보여 준다. 나라도 조사 대상도 달라 수치를 그대로 맞대기는 어렵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하다. 미국 건축 전문가 가운데 AI를 정기적으로 쓰는 사람은 6%였고, 열에 아홉은 AI 출력의 부정확성을 걱정했다. 도구를 먼저 일상으로 쥔 쪽은 건축사가 아니라 건축주일 가능성이 크다.


이미지도 함께 들어온다. AI가 만든 외관 이미지는 사진처럼 매끈하다. 캔틸레버로 날렵하게 뺀 2층, 기둥 없는 통창, 얇은 지붕선이 한 장에 담긴다. 그 이미지에는 구조 부재의 두께도, 단열재의 자리도, 공사비도 없다. 건축주의 기대치는 렌더링 수준으로 올라가 있고, 건축사의 첫 시안은 그 기대치보다 둔해 보인다. 시각 자료의 주도권까지 상담실 밖으로 넘어간 셈이다.


왜 AI의 답은 이렇게 쉽게 믿음을 얻는가. 이유는 형식에 있다. AI는 모른다고 말하는 대신 그럴듯한 숫자를 표로 정리해 준다. 근거가 약한 대목도 단정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건축주에게 그 답은 검색 결과가 아니라 '한 번 상담받은 결과'로 기억된다. 처음 만난 건축사는 그래서 첫 상담자가 아니라 두 번째 의견이 된다.


상담실의 의제를 누가 정하는지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건축사가 대지 분석부터 꺼내며 대화의 순서를 잡았다. 지금은 건축주가 가져온 화면이 첫 의제다. "여기 4층까지 된다고 나오던데요", "평당 700이면 충분하다던데요" 같은 문장이 회의의 출발선을 긋는다. 건축사는 자기 순서로 설명하기 전에 남이 그어 놓은 선부터 지워야 한다. 권력 이동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대화 순서의 변화로 먼저 온다.



첫 미팅은 이제 출발점이 아니라 2차 검토다.


나는 이것을 '선행 답안'이라 부른다. 건축주가 상담 전에 AI에게서 받아 온 결론이다. 선행 답안은 대개 완전히 틀리지 않는다. 불완전하게 맞을 뿐이다. 그리고 불완전하게 맞는 답이 가장 고치기 어렵다. 먼저 들은 숫자는 기준점이 되고, 뒤에 오는 전문가의 말은 그 기준점에서 얼마나 깎이는지로 평가받는다.



2. 정보 비대칭이 무너진 시장의 설계비


과거의 설계 상담은 정보를 파는 일이었다. 용적률과 건폐율, 사선 제한, 주차 대수 산정은 법령집과 조례, 그리고 실무자의 기억 속에 있었다. 건축주는 몰랐고 건축사는 알았다. 상담과 설계비의 상당 부분은 그 앎의 값이었다. 그 질서는 30년 넘게 흔들리지 않았다.


그 비대칭이 무너졌다. 건축주는 이제 이렇게 묻는다. "AI가 다 알려 주는데 설계비는 왜 이렇게 비쌉니까." 무례한 질문이 아니다. 정확한 질문이다. 정보의 값이 떨어졌으니 정보에 매겨진 값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이 시장의 논리다.


문제는 한국의 설계비가 이미 바닥 근처에 있다는 점이다. 공공 건축은 건축사법 제19조의3과 국토교통부 고시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이 대가 산정의 근거가 된다. 민간 건축에는 그런 법적 기준이 없다. 공공 기준을 민간에도 준용하자는 건축사법 개정 논의가 이어지고 있지만, 한 건축사는 칼럼에서 민간 설계비가 30년 전보다 낮다고 썼다. 가격 경쟁이 일상인 시장에 'AI가 해 준다'는 논리까지 얹히면 설계비는 더 내려갈 곳이 없다.

■ 설계비가 사는 것의 이동

건축주 쪽 사정도 들여다봐야 한다. 건축주가 AI에게 먼저 묻는 이유는 건축사를 못 믿어서만이 아니다. 견적을 받기 전에 최소한의 기준을 갖고 싶어서다. 집 한 채에 평생 모은 돈을 거는 사람에게 첫 상담은 정보 격차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 격차를 AI로 메우고 들어오는 것은 합리적인 방어다. 건축사가 이 방어를 불신으로 읽으면 대화는 처음부터 꼬인다.


한번 따져 보자. 설계비가 정보의 값이라면 AI 시대의 설계비는 0원으로 수렴한다. 설계비가 판단과 책임의 값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AI는 판단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책임을 지지는 못한다. 이 차이를 건축주 앞에서 말로, 서류로 보여 주지 못하는 건축사는 정보 판매상으로 남는다. 정보 판매상의 경쟁자는 무료다.


설계비의 단계별 가치도 다시 봐야 한다. 가장 먼저 흔들리는 곳은 기획과 계획설계의 앞단이다. 규모 검토, 배치 대안, 이미지 시안처럼 AI가 흉내 내기 쉬운 업무가 여기에 몰려 있다. 반대로 인허가 협의, 실시설계의 정합성, 공사 중 설계 변경의 판단처럼 책임이 무거운 업무는 AI가 대신하기 어렵다. 앞단의 값은 내려가고 뒷단의 값은 오히려 선명해진다.


RIBA가 짚은 또 하나의 변화는 속도에 대한 기대다. AI로 반복 작업이 빨라지면서 건축주는 더 빠른 회신과 더 투명한 과정을 요구한다. 시안 하나에 일주일이 걸리던 시절의 설계 일정은 이제 설명이 필요한 일정이 됐다. 설계비를 지키려면 속도로 이기려 하기보다, 속도로는 대체되지 않는 판단의 지점을 건축주 앞에 분명히 짚어 줘야 한다.



정보는 공짜가 됐다. 판단은 아직 공짜가 아니다.



3. AI의 오답을 정정하는 일이 새 업무가 된다


AI가 정보를 주면 상담이 쉬워질 것 같다. 현장은 반대로 움직인다. 새 노동이 생겼다. 건축주의 선행 답안 속 틀린 전제를 찾아내고 바로잡는 일이다. 나는 이것을 '정정 노동'이라 부른다.


선행 답안이 자주 놓치는 지점은 거의 정해져 있다. AI는 용도지역의 법정 상한을 말하고 지자체 조례와 지구단위계획은 빠뜨린다. 정북 방향 일조 사선이나 도로 사선은 대지 형상과 방위를 알아야 계산되는데, AI는 반듯한 평지를 가정한다. 공사비는 평균 단가로 답하고 구조와 자재, 지역과 시점의 차이를 지운다. 법령은 학습한 시점의 것을 지금의 것처럼 말한다.

■ 선행 답안이 자주 놓치는 다섯 가지

정정 노동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도면에도 견적서에도 그런 항목은 없다. "그 면적은 사선 제한에서 깎입니다"라는 한 문장을 납득시키는 데 30분이 걸린다. 계산은 AI가 1초에 했지만 설득은 사람이 30분 동안 한다. 건축주는 AI의 답을 먼저 들었고, 건축사의 정정은 깎는 말로 들린다.


행동경제학은 이것을 기준점 효과라고 부른다. 처음 접한 숫자가 이후 판단의 닻이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AI가 말한 '평당 700만 원'은 건축주 머릿속에서 기준선이 되고, 건축사가 제시한 900만 원은 200만 원이 비싼 숫자가 된다. 900만 원이 왜 맞는 숫자인지 설명하기 전에, 700만 원이 왜 이 대지에서 틀린 숫자인지부터 증명해야 한다. 정정 노동은 계산이 아니라 기준점을 옮기는 일이다.


정정의 방식도 중요하다. "AI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건축주는 자기 판단을 공격받았다고 느낀다. 더 나은 문장은 "이 답은 조례 확인 전 단계의 숫자입니다. 여기서부터 확인해 보겠습니다"다. 선행 답안을 부정하지 않고 검증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다. 정정을 깎는 말이 아니라 지켜 주는 말로 바꾸는 기술이 상담의 새 역량이 된다.


법정에서는 이 비용이 이미 청구서로 돌아오고 있다. 2026년 8월 한국경제 보도에 따르면 서울북부지법의 한 민사 사건에서 원고가 인용한 판례 4건 가운데 3건은 존재하지 않는 사건번호였고, 나머지 1건은 내용이 전혀 다른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하나하나 대조해 이를 확인했다. 법원행정처는 2026년 3월, 허위 법령을 인용해 소송을 지연시킨 당사자에게 소송비용을 부담시킬 수 있는 규정을 마련했다. 오답을 바로잡는 비용을 누가 낼지 법원이 먼저 정하기 시작한 셈이다.


감정 현장에도 같은 그림자가 드리운다. 설계 분쟁에서 당사자가 AI에게 받은 검토 결과를 근거 자료로 내미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AI도 이 정도 면적이 나온다고 했다", "AI 계산으로는 공사비가 과다하다"는 주장이다. 감정인은 그 출력물이 어떤 전제와 어떤 시점의 법령 위에서 나왔는지부터 되짚어야 한다. 출력이 그럴듯할수록 검증은 길어지고, 그 시간은 고스란히 감정 비용과 소송 기간으로 돌아온다.


반론도 있다. 공부해 온 건축주는 좋은 건축주다. 기본 용어를 알고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건축주와의 상담은 빠르고 정확하다. 정정 노동은 손해만이 아니다. 틀린 전제를 근거와 함께 바로잡아 주는 순간, 건축주는 처음으로 건축사의 값을 몸으로 느낀다. 정정은 신뢰가 생기는 가장 짧은 경로다.


다만 조건이 붙는다. 정정 노동이 무상으로 흡수되면 앞 장의 논리가 무너진다. 설계비를 판단의 값으로 다시 정의하자고 하면서 판단의 핵심인 정정을 공짜로 내주는 꼴이다. 판단을 팔려면 판단이 보여야 한다. 보이려면 기록돼야 한다.



기록되지 않은 정정은 서비스가 되고, 서비스는 값을 받지 못한다.



4. 상담자에서 검증자로: 건축사의 자리 이동


건축사의 자리는 옮겨 간다. 답을 먼저 주던 상담자에서, 이미 나온 답을 검증하는 검증자로. 미국의 건축 칼럼니스트 에릭 세살(Eric J. Cesal)은 건축주가 AI를 쓰는 만큼 건축 업무에도 AI가 드러나길 기대할 것이고, AI의 오답 같은 위험을 막는 '가드레일' 산업이 커질 것이라 내다봤다. 건축 상담에서 그 가드레일을 가장 먼저 세울 수 있는 사람은 그 땅과 그 법규에 이름을 거는 건축사다.

검증자의 일은 세 갈래다. 먼저 전제를 확인한다. 건축주가 가져온 숫자가 이 필지의 조례와 계획에 맞는지 본다. 다음으로 시점을 확인한다. AI가 말한 법령이 지금도 유효한지 현행 원문과 대조한다. 마지막으로 현장을 확인한다. 도면과 지도에 없는 옹벽, 배수로, 이웃 건물의 기초는 발로 가야 보인다.


검증자가 되려면 건축사도 AI를 써야 한다. 건축주가 받은 답을 같은 도구로 재현해 봐야 어디서 틀렸는지 빨리 찾는다. 상대가 쓰는 도구의 버릇을 모르는 검증자는 매번 처음부터 계산한다. 반대로 도구의 버릇을 아는 검증자는 조례, 사선, 법령 시점처럼 AI가 자주 넘어지는 자리부터 짚는다. AI를 거부하는 건축사가 아니라 AI의 실수 패턴을 가장 잘 아는 건축사가 살아남는다.


이 이동은 설계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감리 현장에서도 건축주는 AI에게 묻고 온다. 콘크리트 양생 기간이 충분한지, 방수층 시공 순서가 맞는지, 하자 보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고 현장에 선다. 시공사도 감리자도 같은 질문을 받는다. 설계에서 시작된 검증자의 자리는 시공과 감리, 그리고 분쟁 감정까지 이어진다.


이 검증은 종이 메모로는 남지 않는다. 지금 많은 사무소의 상담 기록은 수첩 한 장과 메신저 몇 줄이다. 건축주가 어떤 선행 답안을 들고 왔는지, 건축사가 무엇을 어떤 근거로 고쳤는지는 기억 속에만 있다. 분쟁이 나면 기억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 감정 현장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 있다. "처음엔 그렇게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는 주장 앞에서, 건축사는 상담 당시의 전제를 입증할 종이 한 장이 없다.


디지털 검증 기록으로 바꾸면 장면이 달라진다. 건축주가 가져온 AI 답변을 원문 그대로 받아 스마트폰에서 항목별로 쪼갠다. 각 항목 옆에 확인 결과와 근거 법령, 조례 링크, 위치와 시간이 찍힌 현장 사진을 붙인다. AI는 조항 대조와 누락 항목 경고를 맡고, 건축사는 판단과 서명을 맡는다. 상담이 끝나면 '선행 답안 검증서' 한 장이 건축주 손에 남는다. 정정 노동이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산출물이 된다.


검증서는 거창할 필요가 없다. A4 두 장이면 충분하다. 왼쪽 칸에는 건축주가 가져온 AI 답변을 문장 그대로 옮긴다. 가운데 칸에는 적합, 조건부, 부적합 가운데 하나로 판정을 적는다. 오른쪽 칸에는 근거 조항과 조례 번호, 확인한 날짜, 현장 사진 번호를 붙인다. 마지막 줄에는 검토한 건축사의 이름과 서명이 들어간다. 건축주는 이 종이를 받아 들고 처음으로 자기가 믿었던 숫자와 실제 숫자의 차이를 한눈에 본다.

■ 상담 기록의 전환

이 전환은 설계비의 논리와 맞물린다. 검증서를 남기는 순간 사전 검토는 공짜 상담이 아니라 값을 받는 상품이 된다. AI가 무료로 내놓은 답을 건축사가 유료로 검증하는 구조다. 3만 원짜리 상담과 0원짜리 AI 사이에서 버티는 길이 아니다. 그 둘 위에 올라서는 길이다. 언제 시작하는가. 지금이다.

■ 지금 시작할 것

답을 주는 사람에서, 답에 서명하는 사람으로.



5. 신뢰는 정보가 아니라 책임에서 나온다


건축주는 AI에게서 정보를 얻는다. 빠르고, 싸고, 친절하다. 그러나 집을 짓는 사람이 마지막에 기대는 것은 정보가 아니다. 그 정보가 틀렸을 때 누가 책임지는가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정보는 아무리 정확해도 신뢰가 되지 못한다.


법은 이 질문에 답을 정해 두었다. 건축법 제23조는 건축허가를 받거나 건축신고를 해야 하는 건축물의 설계를 건축사가 아니면 할 수 없도록 했다. 설계도서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그 도면에 답한다. AI는 수천 장의 도면을 그려도 한 장에도 서명하지 않는다. 서명하지 않는 존재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서명의 값'이라 부른다. 정보가 평평해진 시장에서 건축사가 파는 마지막이자 가장 단단한 상품이다. 서명의 값은 법이 저절로 보장해 주지 않는다. 법은 자격을 줄 뿐이다. 값은 선행 답안을 검증하고, 정정 노동을 기록하고, 그 기록 위에 이름을 올리는 습관에서 나온다.


이 원칙은 건축사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건축사가 AI로 규모 검토를 하고 도면 초안을 뽑아도 서명하는 순간 그 결과는 건축사의 판단이 된다. 'AI가 그렇게 계산했다'는 말은 건축주에게도, 법정에서도 면책 사유가 되지 못한다. 건축주의 선행 답안을 검증하는 건축사라면 자기 사무소의 AI 출력도 같은 잣대로 검증해야 한다. 남의 오답을 잡는 눈과 내 오답을 잡는 눈은 같은 눈이다.


서명의 값은 계약서에서 먼저 지켜야 한다. 설계 계약서에 건축주가 제공한 AI 산출물의 지위를 한 줄 적어 두자. 건축주가 가져온 AI 자료는 참고자료이며, 건축사가 검증해 확정한 내용만 설계 조건이 된다는 문장이다. 이 한 줄이 없으면 분쟁에서 '처음 들은 숫자'와 '확정한 숫자'의 경계가 흐려진다. 검증서와 계약 조항이 짝을 이룰 때 정정 노동은 기록이 되고, 기록은 방어가 된다.


바꾸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첫 미팅이 숫자 다툼이 아니라 전제 확인으로 시작된다. 기획 단계에서 걸러진 오류는 설계 변경과 공사비 증액으로 번지지 않는다. 사전 검토가 값을 받는 업무가 되면서 설계비 협상의 근거가 생긴다. 분쟁이 나도 '그때 무엇을 근거로 무엇을 확인했는가'를 서류로 보여 줄 수 있다. 건축주는 정보 대신 확신을 사고, 건축사는 시간 대신 판단을 판다.

감정인의 자리에서 보면 더 분명하다. 건설 분쟁은 결국 누가 무엇을 근거로 판단했는가를 묻는다. AI의 답은 근거가 되지 못한다. 사람이 그 답을 확인하고 남긴 기록만이 근거가 된다. 앞으로의 설계 분쟁은 AI가 틀린 것을 누가 언제 알았고, 알고 나서 무엇을 했는지를 다투게 될 것이다. 그 다툼에서 이기는 쪽은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더 정확히 기록한 사람이다.


건축주가 AI에게 먼저 묻고 온다는 사실은 건축사가 필요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무엇을 팔아야 하는지 다시 정하라는 요구다. 정보를 팔던 건축사는 무료와 경쟁한다. 책임을 파는 건축사는 경쟁자가 없다.

AI는 답을 말한다. 건축사는 그 답에 이름을 건다.

참고자료


1. 과학기술정보통신부, 「2025 인터넷이용실태조사」 결과 발표(2026.3.31), 뉴스서울 보도. newsseoul.co.kr/news/view/1065588010791034


2. RIBA, Domestic project focus: how has AI changed the relationship between architect and client?(2026.7.23). riba.org


3. RIBA, Second RIBA AI Report shows surge in usage among UK architects(2025.6.27). riba.org/news


4. RIBA, RIBA AI Report 2026. riba.org/work/insights-and-resources/ai-report


5. AIA, New research explores perceptions and opportunities of artificial intelligence in architecture(2025.3.11). aia.org


6. 국토교통부 고시 제2020-635호,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2020.9.14), 대한건축사협회. kira.or.kr


7. 브런치 @kahn, 「민간 건축물 설계 대가 법제화를 기다리면서」. brunch.co.kr/@kahn/796


8. 한국경제, 「AI, 있지도 않은 사건번호 생성」(2026.8.2). hankyung.com/article/2026080200981


9. Eric J. Cesal, How A.I. Will Change Architectural Clients in 2025. ericjcesal.substack.com


10. 크몽, 건축 초기 계획 상담 상품(2026.10.23 조회). kmong.com/gig/696621


11. 건축법 제23조(건축물의 설계), 건축사법 제19조의3. 국가법령정보센터 law.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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